수-목은 경정장, 금-토-일은 경륜장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미디어다음 / 심규진 기자 media_kyujin@hanmail.net 지난해 6월 개장한 미사리 경정장. 평일 대낮인데도 매일 1만2000여명이 경기장을 메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대낮에 여기 와서 베팅할 시간이 있겠어요? 수-목에는 경정장, 주말에는 경륜장으로 출근하는 '전문꾼'들이 대부분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경정 예상지를 파는 한 아주머니의 말이다. 경정장 입구에서 OMR 카드용 사인펜을 파는 행상은 대략 30여명.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부업도 겸한다. 10만원에 3000원 꼴인 수수료로, 하루 5만원 이상은 번다. 예상지를 분석하며 베팅에 몰두하던 40대 남자는 지난 6개월동안 경정에서 퇴직금 수천만원을 잃었지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경륜에서는 요즘 '전적'이 좋아요. 실력이 더 붙으면 경정에서도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겁니다. 난 신용불량자 같은 거 안됩니다. 빚 안내고 철저히 내 돈 가지고만 하거든요. 하루에 딱 100만원씩만 베팅하죠." 평일 대낮, 미사리 경정장을 찾는 사람들. 경마, 경륜에도 빠져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미디어다음 그러나 10여년간 경정, 경륜, 경마를 모두 섭렵하며 도박에는 전문가임을 자처하는 택시 기사 최모 씨의 얘기는 다르다. 그는 "경정, 경마로 돈을 딴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단언했다. 10억원 상당의 건물과 식당을 소유했던 그는 경마에 빠져들면서 모든 가산을 탕진했다. 나중에는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지금은 택시를 몰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인데도 아직도 경정장이나 경마장 방향으로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꺾게 된다고 한탄했다. "소액이라도 베팅을 하고 담배 한 개비라도 피우고 가야 혹독한 일상을 잊을 수 있다"는 그는 분명한 '도박 중독자'였다. 레저는 없고 도박만 남다. 제주 경마장 전국 자치단체들은 저마다 도박장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행 산업 유치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시는 화상 경륜장에 이어 야외 경륜장까지 유치할 계획이다. 청주, 제천, 부산 등에서도 경마, 경견(개경주) 등의 도박장을 세우려는 움직임이다. 명분은 한결같다. 레저 산업 활성화, 관광객 유치, 도박 자금 타지역 유출 금지, 지역 경제 활성화 등이다. 과연 이들 산업이 관광 진흥과 지역 경기 부흥, 시민들의 건전한 여가 생활에 이바지하고 있을까. 지난 90년 개장한 제주 경마장. 토요일인 지난달 28일 12시20분. 서부 관광 도로에서 경마장으로 들어서는 진입로가 수백대의 택시들로 빼곡하다. 어느 곳도 차가 막히지 않는다는 환상의 섬에서 그러나 '경마장 가는 길'은 주말마다 유일하게 정체를 빚는 곳이다. 2000여대의 차량 가운데 관광객이 타는 넘버에 '허'자가 포함된 렌터카나 패키지 관광객들을 몰고 다니는 관광 버스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이용자들이 대부분 제주도민이라는 증거다. 개장 당시 경마장을 관광 명소로 키우겠다던 마사회와 제주도의 야무진 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경쾌한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 첫 레이스. 사람들의 눈이 한곳 집중된다. 2cm의 코 하나 차이로 승부가 갈리고,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탄성이 터진다. 더러는 욕설도 섞여있다. 아이들과 함께 온 부부 관람객들도 눈에 띄지만, 단란한 가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부모들은 경마지만 뚫어져라 바라보고있고, 아이들은 자전거 대여소에서 제공하는 세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혼자 놀고 있다. 제주 경마장 앞을 가득 메운 택시들. ⓒ미디어다음 마지막 10경주가 남자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인다. "마지막까지 안 하시고 벌써 가세요?" "나갈 때 차가 얼마나 막히는데 먼저 일어서야지" 40~50대 남녀 5~6명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같은 동네에서 계원이라는 이들은 매주 경마장에서 친목을 다진다고 했다. 출석률은 거의 매번 100퍼센트. 따는 사람이 저녁을 산다. 이들은 "외지에서 제주 경마장 갖고 제주 사람들이 다 도박한다고 매도하면 억울하다"고 했다. "주말에 야외 나와서 공기도 쐬고 동네 사람들이 같이 뭉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그날은 50만원 배팅했는데 다 잃긴 했지만 더러는 딸 때도 있다고 한다. 오히려 외부의 부정적인 인식을 우려하는 기색이다. 마지막 10경주까지 모두 끝났다. 허탈감과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제주 각지로 떠나는 버스 세 대가 기다린다. 버스는 새로운 '경마 공동체'가 생겨나는 곳이다. 마주나 기수와 연관이 있다는 사람이 나서 이런 저런 정보를 흘리고 베팅을 유도한다. 암암리에 큰돈이 오가는 사설 경마로까지 이어진다. 정보 제공자가 권해준 말을 믿고 베팅을 했다가 수백만원씩 잃게 되는 경우, 욕설과 주먹 다짐이 오가는 게 다반사지만, 이를 근절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창원 시민들, 경륜장 반대 여론 높아져 대전 YMCA가 창원시민 26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47명이 반대했고, 47명이 찬성했다. 또 경륜장이 레저 시설이라고 응답한 경우는 10.8%인 반면 도박시설이라고 응답한 경우는 70%에 달했다. 경륜장 유치를 놓고 지역 사회가 여론이 갈려 있는 대전에서는 가산탕진과 가정파괴 등 도박중독의 폐해를 우려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창원 경륜장의 실태 조사 결과 주이용객이 지역민이고, 도박 중독으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경륜장 '불신'과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대전 참여 자치 시민연대가 실시한 연구 조사 결과 사행 산업의 중독자 비율은 경마 35.7%,카지노 27.3%, 경륜 44.4%로 인터넷 도박(30.9%)을 앞지르는 수준이다. 우리나라 2002년도 사행산업의 총 매출은 13조 9천억원. 그러나 가산 탕진과 도박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15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각종 사행시설의 1회 평균 베팅 금액은 카지노가 290만원으로 가장 많고, 경마가 37만원, 경륜이 35만원이었다. 이쯤 되면 '레저'인지 '도박'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사행산업을 유치하겠다는 지자체들은 '서민들이 가족과 함께 즐기는 레저공간', '관광 진흥과 지역 상권을 살리는 촉매제'를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각종 사행산업의 그늘에는 절제하지 못하는 욕망에 휘둘려 파멸의 무덤을 파는 지역 서민들의 신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