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국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내 동생 마쁠랑이 한글로 써 보낸 편지.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억/ 나는 사랑”
“나는 생각한다/ 장춘시”
“나는 태국에서 기억”
이 문장들을 보는 순간 ‘장춘시’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장춘시가 뭘까. 그리고 정확히 10초 후 든 생각. 이 서툰 문장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초등학교 5학년, 10년 동안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을 언어를 태국어를 못 읽는 언니를 위해 열심히 번역하고 있는 내 동생 마쁠랑의 모습이 그려진다. 마음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5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라온아띠 면접을 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기 위해 매주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또 이를 통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훈련 강의를 듣는 순간 ‘뭐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시민사회, 국제자원활동 등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었다. 여긴 UN, YMCA이런 곳의 자원봉사자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만 오는 곳인가? 난 대체 왜 뽑힌 걸까. 나를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간 YMCA 간사님들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가서 살다오는 것, 그게 자원활동가야.” 뭔가를 하지 말고 그냥 살다오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대학생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내가 ‘멍청이’같다고 느꼈다. ‘어리석고 사리 분별력이 모자란 사람’이란 뜻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일을 할 때 난 똑부러져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뭐든지 척척 대답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딴용 피바(바보)!”
국내훈련이라는 폭풍우가 머리와 마음을 훅 쓸고 나니 어느새 나는 태국에 도착해 ‘딴용’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딴용’의 삶은 한국에서 ‘수진’으로 살던 삶과는 전혀 달랐다. 똑순이(엄마 말을 빌리자면)로 살던 나는 여기서 하는 것마다 실수투성이인 ‘피바(바보)’가 됐다. 페인트도, 언어도, 가르치는 것도 모든 것이 서툴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서서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욕심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서투른 내 모습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홈스테이를 시작하면서도 ‘가장’, ‘제대로’라는 단어가 내 머리 속에 박혀있었다. 가장 친해져야지, 제대로 잘 해야지.
“영화 보는 거 좋아해?” “아니”
“노래 듣거나 부르는 건?” “별로...”
“음, 그럼 애니메이션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야?” “없어”
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던 내 룸메이트 16살 여동생은 내가 파고 들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았다. 시도를 하는 족족 막힌다는 생각에 너무 막막했다. 그리고 초조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나, 내 자신이 너무 스트레스였다.
그러면서 나날이 사람과 대화하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동생이 항상 마음에 걸렸고,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게 잘해주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뭐든 해야 될 것만 같았다. ‘가장’, ‘제대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박히면 박힐수록 나도 지쳐갔다.
내가 ‘가장’, ‘제대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우린 홈스테이 마을을 바꾸게 됐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난 그 마을을 떠나게 됐다. 관계로 인한 아픔, 실패는 생각보다 내게 큰 상처로 남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있었지만 사람이 싫었다. YMCA 스텝도 싫었고, 친구들도, 팀원들도 다 싫었다. 이 상처를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미웠으니까. 새로운 홈스테이를 가는 게 너무 겁이 났다.
그렇게 다가온 홈스테이 첫 날.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등이 쓰인 종이를 흔들며 우리를 반겨주던 아이들, 수줍게 웃던 마쁠랑, 우리 가족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던 나. 엄마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그 1분이 내게는 1초처럼 느껴졌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데, 벌써 도착이라니.’
처음 이틀은 나도 가족들도 조심스러웠다. 난 내 마음을 열 준비가 안됐고, 가족들은 이런 내게 말을 걸기가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아침마다 잘 잤느냐는 안부를 묻고 저녁엔 그 날 하루를 공유하고, 밤이면 아빠가 사온 태국어 책으로 공부를 하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로가 서로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질 때쯤 잠시 산캄팽에 갔다 올 일이 생겼다. 가기 전날 밤, 아빠가 툭, 종이 한 장을 내미셨다. 처음에는 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100밧의 돈이었다. 극구 사양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돈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고, 이게 맞는 일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퍼, 찡찡 마이뻰라이 카.(아빠, 정말 괜찮아요.) 찬 미 땅 카.(저 돈 있어요. )”
“마이뻰라이(괜찮아). 퍼 타이 하이 땅 룩싸오 까올리(태국아빠가 한국 딸에게 주는 거야). 땅니 퍼 마이? 쓰 똥깐 카놈 다이마이?(이 돈이면 충분해? 원하는 간식 살 수 있어?)”
순간 울컥했다. 한국에 있는 우리아빠 같았다. 넉넉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해주고 싶고, 피곤해도 같이 대화하고 싶어 하는 진짜 아빠. 진짜 가족.
이 때 깨달았다. 부족해도 되는 거였다.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 나였다. 난 아직도 ‘가장’, ‘제대로’를 외치던 한국에서의 ‘수진’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보였다. 사람들에게 나는 잘해줘야 할 외국인이 아니라 조금 멀리 사는 딸, 언니 혹은 친구, 그저 ‘딴용’이었다. 문뜩 잊고 있던 말이 생각났다. “가서 살다오는 것, 그게 자원활동가야.”
난 아직도 마쁠랑이 보낸 ‘장춘시’가 무슨 말을 번역한 건지 모른다. 하지만 단어에 담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일상들, 거기서 느낀 희노애락 그게 장춘시다. 자원활동도 결국 ‘장춘시’와 같다. ㄱ부터 ㅎ까지 뜻을 나열한 사전처럼 정해진 지침서가 있는 게 아니라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 내게 넌 태국에서 뭘 하다 왔니?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니? 라고 묻는 다면 나는 “딴용으로 사는 법을 배웠고, 장춘시 같은 사람냄새 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2014. 02. 01.
Ton Yong(딴용)
